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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구타·고문… 지옥의 문이 열렸다” 강제북송 겪은 탈북민 4인의 이야기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18-03-22 조회수 : 87

[인권] “구타·고문… 지옥의 문이 열렸다” 강제북송 겪은 탈북민 4인의 이야기

 

 

강제북송돼 보위부 취조실에서 구타당하는 탈북여성.photo 유튜브 영상 캡처
지난 11월 4일 중국 선양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된 탈북민 10명이 11월 17일 북한으로 강제북송됐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체포 사실이 알려진 직후 탈북민을 구출하기 위한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노력이 있었으나 강제북송을 막지 못했다. 11월 11일에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한·중 고위 외교 당국자 접촉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에게 “탈북자들이 원할 경우 신병을 접수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밝혔고 중국 측은 “알아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제북송된 탈북민 중에는 네 살 된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포함돼 있었다. 한국에 먼저 들어온 이 아이의 아버지는 11월 11일 BBCCNN 방송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아내와 아들의 북송을 막아달라는 영상메시지를 보냈다. 휴먼라이츠워치(HRW), 세계기독인연대(CSW), 앰네스티인터내셔널(AI) 등 국제인권단체도 탈북민 구출을 위해 목소리를 냈으나 중국 정부는 끝내 탈북민을 강제북송했다.

그동안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의 인권 상황은 많이 알려져왔다. 그러나 강제북송 이후 탈북민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주간조선은 강제북송됐다 탈북한 4인을 만나 강제북송 이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곽정애(63)씨는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 강제북송을 당했다. 곽씨가 처음 탈북했던 해는 1998년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1995~1998)를 통과하며 남편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고 군복무 중이던 아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로 돌아왔다. 곽씨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중국에 건너가 생활하다 2002년 7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지린성 옌지(延吉)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는 “중국 감옥에서 의식이 혼미해질 때까지 구타당했으며 임신한 탈북여성의 강제낙태 장면도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후 지린성 투먼(圖們)시 변방대로 옮겨졌다가 함경북도 남양 보위부로 북송된다. 곽씨는 함께 북송됐던 한 탈북여성이 북송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곽씨의 증언이다.

“보위부에서 처음 조사를 받을 때 알몸 상태로 조사를 받았고 몸에 숨겨둔 현금이 있는지 성기 속까지 검사했다. 알몸 상태로 높이뛰기 100번을 시키는 등 추악한 고문에 모멸감을 느끼며 치를 떨었다. 제공되는 음식은 멀건 국수죽뿐이었고 한 자세로 하루 종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문을 받았는데 이는 강제노동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까지 척추디스크로 고통받고 있으며 취조 과정에서 주먹에 맞아 오른쪽 귀의 고막이 터졌고 한쪽 청각을 잃었다. 한 탈북여성이 아이를 낳자 갓 태어난 아기를 발로 밟아죽이는 모습도 목격했다.”

창고에 쌓아둔 시체들

그는 남양 보위부에서 한 달간 조사를 받은 후 남양 단련대로 이송됐다. 단련대에서는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낮에는 강제노동을 하고 밤에는 사상교육을 받았다. 영양실조에 걸린 수감자들은 강제노동과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마다 죽어나갔다. 곽씨의 말을 더 들어보자.

“단련대에서는 청년 2명이 담배꽁초를 주웠다는 이유로 손톱 밑을 쇠꼬챙이로 찌르는 고문을 당했다. 노역 중에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군홧발로 차이고 짓밟혔다. 감방 안에는 화장실이 없어 대야에는 대소변이 넘쳐났고 악취가 진동했다. 감방은 짐승의 우리와 같았다. 밤에는 단련대 지도원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 수감자들을 불러내가곤 했다.” 곽씨는 단련대에서 10일간 수감된 후 청진 집결소로 보내졌다. 청진 집결소에서도 하루에 수명씩 수감자들이 죽어나갔고 시체를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어디론가 실어갔다. 이후 거주지였던 함흥 단련대로 옮겨진다. 중국에서 체포됐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함흥 단련대에서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북한의 감옥은 의복을 지급하지 않기에 많은 수감자들이 여름옷을 입은 채 혹한을 이겨내야 했다. 곽씨는 영양실조, 고혈압, 탈수증세 등으로 여러 차례 쇼크상태를 경험했다. 그의 딸이 뇌물을 써서 출소하게 됐는데 곽씨는 “단련대에 더 있었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향인 함흥에 돌아왔지만 마을 곳곳 아사자(餓死者)들의 시체가 뒹굴었고 보위부 지도원들의 감시와 뇌물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곽씨는 2004년에 재탈북을 시도한다. 생계 목적으로 탈북했던 첫 탈북과는 달리 한국행을 위한 탈북이었다. 베이징(北京)까지 무사히 이동했으나 탈북 브로커의 실수로 중국 공안에 잡히게 된다. 그는 랴오닝성 단둥(丹東) 변방대를 거쳐 신의주 보위부로 북송된다. 한국행을 시도했기에 정치범수용소에 가게 될 상황이었으나 함께 붙잡힌 탈북민이 곽씨는 베이징에 생계 목적으로 있다가 한국행을 시도하는 이들과 우연히 만난 것이라 변호해줘서 경제사범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곽씨를 변호해준 탈북민은 이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사망했다고 한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은 뒤 신의주 집결소를 거쳐 함흥 단련대에 다시 보내졌고 강제노역과 고문에 시달리다 영양실조에 걸린다. 극심한 영양실조로 아사 직전 상태까지 이르자 일시 출소됐고 원기를 회복한 뒤 단련대로 다시 끌려가 6개월을 더 복역하고 출소하게 된다. 그는 출소 이후 2006년에 다시 탈북을 시도했고 유엔난민기구(UNHCR)의 도움을 받아 2008년에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함경북도 OO 출신의 A씨는 2006년에 강제북송을 당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에서 집단 아사가 발생하며 대량 탈북이 일어났다. 당시 A씨의 가족과 친척 가운데도 굶어죽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에는 사태가 너무 심각해 먹을 것을 구하러 중국으로 탈북하는 행위에 대해 북한 당국도 강하게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시절 그의 가족 중 한 명도 탈북해 연락이 단절됐다가 2000년대 중반에 연락이 닿게 된다. 탈북한 A씨의 가족은 한국에 정착해 있었고 돈을 보내오며 탈북할 것을 강권했다. A씨는 줄곧 탈북 권유를 거부하다 2006년 1월 말 북한에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느끼고 탈북을 시도한다. 한국에 있는 가족이 보내준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함경북도 회령, 중국 지린성 옌지 등을 거쳐 2006년 3월 중순 내몽골 만주리(满洲里)에 도착한다. 차량을 타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 중 중국 변방대에 체포된다. A씨가 탑승했던 차량이 맞은편에 변방대 차량이 나타나자 방향을 바꿔 이동했고 이를 수상히 여긴 변방대가 검문을 한 것이다. A씨는 중국 공안에게 조사를 받은 후 2006년 3월 말 중국 OO 변방대로 이송된다. 내몽골 지역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한국행 혐의를 받고 중형에 처해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국 공안의 선처를 받아 북·중 접경지역에서 붙잡힌 경제사범으로 처리돼 2006년 4월 말 북한 OO 보위부에 넘겨진다.

강제북송돼 전거리교화소에서 7년간 복역했던 탈북민의 그림. 보위부 지도원들이 취조 전 알몸검사를 하고 있다.photo 세이지코리아

식사는 곰팡이 핀 옥수수죽뿐

A씨의 증언이다. “3평(10㎡)짜리 감옥에 50명을 가뒀다. 낮에는 노동과 체벌에 시달리고 밤에는 좁디좁은 공간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심신이 허약한 채로 들어온 한 여성 수감자는 3일 만에 정신이상을 보이며 소리를 지르다가 끌려나갔고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보위부에서 제공한 식사는 곰팡이 핀 옥수수로 끓인 죽이었다. 처음에는 냄새가 나서 먹지 못했으나 굶주림에 시달리다 보니 먹게 됐다. 씻을 물이 감방 내 변소에서 나오는 물밖에 없어 변기를 깨끗이 닦은 후 물을 받아 씻었다.”

A씨는 이후 노동단련대로 보내져 강제노역을 하다 영양실조에 걸린다. 감옥에서 죽는구나 했는데 봄철 농촌동원을 나가 옥수수국수를 먹고 기력을 회복한다. 도 집결소를 거쳐 6월 말 고향의 지역 안전부로 옮겨진다. 지역 안전부에서는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청년이 땅을 기어다니며 노동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지역 안전부에 와서는 가족들이 면회식을 넣어줘 영양실조 상태를 면할 수 있었다. 2006년 7월 초 안전부 지도원들은 A씨를 장마당에 세워둔 채 동네 주민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죄인임을 알렸다. A씨는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2006년 8월 말에 법정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남은 형기를 OO 단련대에서 복역했다. 재판은 변호사 없이 진행됐으며 단심으로 이뤄졌다. A씨는 출소 이후 2007년 10월 말 탈북해 캄보디아를 거쳐 2008년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B씨는 처음에는 탈북에 대한 생각 없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중국을 왕래하다 두만강 경비대에 체포됐다. 2000년에 B씨의 둘째 아들이 중국 무역을 위해 두만강을 넘다 붙잡혀 안전부에 수감됐다. B씨는 아들에게 면회식을 넣어주고 안전부 지도원에게 줄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했다. 면회식을 넣어주기 위해서는 지도원에게 뇌물을 제공해야 했다. 돈은 앞서 탈북해 중국에서 지내고 있는 B씨의 첫째 딸이 마련해주고 있었다. B씨와 딸이 만나기로 한 날, 딸은 돈을 주려고 오는 길에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고 B씨는 딸을 만나지 못한 채 북한으로 돌아가던 중 두만강 경비대에 붙잡혔다. B씨와 그의 딸은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되나 가족임이 알려지면 형량이 커질 것을 우려해 모른 체하며 지냈다.

B씨의 증언이다. “감옥에서 하루 종일 동일한 자세를 취하는 고문을 당했고 잘못하면 쇠꼬챙이로 피가 터질 때까지 맞았다. 한 감방 안에 20여명이 생활했는데 누울 자리가 없어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한 사람만 잘못해도 단체 고문을 받았다. 식사는 콩이 조금 섞인 통강냉이 한 줌과 소금국이 전부였다.”

B씨와 그의 딸은 단순경제사범으로 처리돼 12일 만에 출소한다. 이후에는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둘째 아들을 찾아가지 못했다. 2년형 복역이 끝났음에도 아들에 대한 소식이 없었다. 확인해 보니 뇌물이 끊어진 뒤 지하 갱으로 보내져 노역하다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둘째 아들의 6살짜리 아들은 당세포비서 가정으로 끌려간 뒤 꽃제비 생활을 하다 병사했다. 그의 맏아들은 군복무 중 사망했다. B씨는 2008년 첫째 딸, 맏손자와 함께 탈북해 2009년 3월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C씨는 2007년 한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 나왔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북한 장마당에서 받은 달러 지폐가 위조지폐인 줄 모르고 사용하다 신고를 당해 중국 공안에 넘겨진 것이다. 북한으로 북송돼 청진 집결소 등에서 3달간 복역하다 대장염 등 병이 심해지자 풀려났다. 옥수수죽 식사 등 집결소 내에서의 구금생활은 다른 탈북민의 증언과 일치했다. C씨는 이후 재탈북 과정에서 두만강을 건넌 직후 중국 공안에 발각되나 지체장애인 연기를 통해 위기를 모면한다. 그는 중국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보는 보모 생활을 하며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냈다. 중국에서 살던 중 한국행을 권유받고 2010년에 입국하게 된다.

 


지난 11월 30일 청와대 앞에서 열린 ‘탈북난민 강제북송 중지요구’ 촉구 기자회견.photo 북한인권단체연합회


수감자의 30~40% 6개월 이내 사망

2013년 말 북한인권정보센터(이사장 이재춘)에서 발간한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으로 인한 인권침해 실태와 개선방안’ 연구서는 강제북송된 탈북민의 송환 및 구금시설 이동경로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탈북민이 중국 공안에 붙잡히면 북·중 접경지역의 중국 변방대에 구금돼 있다가 북한 국경 관할 보위부로 송환된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거친 후 도 집결소로 보내지고 최종적으로 거주지역 구금시설로 이감된다. 이 과정에서 단련대로 보내져 강제노역을 하기도 한다. 북한의 사법 체계는 형의 결정과 집행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아닌 피의자의 거주지 관할 사법기관에서 담당하도록 돼 있어 지역 구금시설에 도착해야 재판을 받고 형량이 정해진다. 이는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제북송된 이들의 상당수가 지역 구금시설로 이감돼 재판을 받기도 전에 사망에 이르고 있다.

 

이한별 북한인권증진센터 대표는 “탈북민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수감자의 30~40%가 6개월을 못 버티고 죽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정치사범이냐 경제사범이냐에 따라 형량이 크게 달라진다. 생계 목적으로 탈북한 경제사범의 경우 보통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단련대, 교화소 등에서 징역살이를 한다. 그러나 한국행을 시도했거나 기독교를 접했던 것이 발각될 경우 정치사범으로 분류돼 정치범수용소에 갇히거나 사형에 처해진다. 정치범수용소는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혁명화구역은 일정 형량을 살고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완전통제구역은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완전통제구역에서 구금돼 있다 살아나온 유일한 증언자로는 김용씨가 있다. 그는 이례적으로 완전통제구역에서 혁명화구역으로 이감됐기에 살아나올 수 있었다. 정치범수용소에 구금된 이들은 일반 구금시설보다 더 강한 강제노역과 고문, 구타에 시달리며 굶어죽지 않기 위해 쥐, 개구리, 뱀, 지렁이 등을 날로 먹으며 소똥에 박힌 옥수수까지 빼먹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인터뷰를 한 탈북민 4인은 강제북송 후 살아남아 재탈북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탈북민이 탈북 과정에서 죽거나 강제북송돼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다. 재중 탈북민의 수는 조사기관에 따라 적게는 1만~1만5000명에서 많게는 10만~15만명까지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강제북송의 두려움에 떨며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노동착취, 성폭행 등의 극심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 이에 유엔 등 국제사회는 재중 탈북민의 강제북송 금지 및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발표한 권고안에서 “중국은 재중 탈북민을 최소한 현지 난민으로 대우하고 ‘국제난민에 관한 협약’이나 국제법상의 ‘강제송환금지 원칙’을 준수해 탈북민을 북한으로 강제송환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지난 11월 30일 국내외 70여개의 북한인권단체가 속해 있는 북한인권단체연합회(이하 북인연)는 청와대 앞에서 ‘탈북난민 강제북송 중지요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북인연은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2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국제법의 원칙에 따른 탈북민 강제송환 중지 및 탈북난민 보호를 요구하고, 재중 탈북민이 대한민국 입국을 원한다면 우리 정부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음을 명확히 밝히라”고 촉구했다. 정베드로 북인연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까지 역임한 바 있는데 우리 정부가 북한인권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 강제북송 사태도 우리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고 말했다. 앞서 11월 29일에는 선민네트워크(대표 김규호)와 탈북동포회(회장 한금복) 주최로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민 강제북송 중지 호소 수요집회’가 열렸다. 2008년 9월 시작된 이래 400번째를 맞은 집회로 참가자 20여명은 “중국 정부는 탈북난민 강제북송을 중단하라”고 호소했다.

  

원문기사링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3&aid=0000024145